은희경, <태연한 인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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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카페로 찾아오겠다는 이안을 못 오게 할 이유는 없었다. 달리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은 뒤 요셉은 곧바로 후회했다. 오래전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안은 지루한 청년이었다. 화제가 뻔했고 결론을 낼 필요 없는 일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최악의 경우 예술의 불길한 운명이나 예술가의 각오 따위에 대해 지껼여 대기도 했다. 이안처럼 자신의 무지를 순수함이라고 착각하는 부류들은 걸핏하면 자신이 그 이유로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피곤했다. 보나마나 술값도 없을 것이다. 요셉의 오후 시간의 즐거움에 보탬이 될 만한 건 한가지도 갖고 있지 않은 셈이었다. 요셉에게는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상의할 것이 있다는 이안의 용건이 궁금할 턱도 없었다. 요셉은 남의 이야기와 사연 듣기를 싫어했다. 자기 인생이 대하 소설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의 이야기일수록 상투적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꼭 한번 소설로 써보라는 사람에게 요셉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니 당신이 직접 쓰라고 대답해왔다. 조언과 충고를 구하는 사람도 질색이었다. 의욕적인 계획을 늘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원할 뿐이었다.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희망을 기대했다. 비관이 신중함이고 냉정해야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셉의 충고를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결국 시간만 아까웠다.
요셉이 강의를 하게 된 것은 그 학교 교수인 동료 소설가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때는 요셉이 1년에 한두편씩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때였다. 마지못해 그는 봄학기만 맡겠다고 말했다. 스승의 날에 선물을 받은 다음 그만두겠다는 요셉의 말에 동료 소설가는 그의 생일이 언제인지 물었다. 10월이라고 하자 가을학기에 받게 될 선물을 놓치면 아깝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그 농담이 재미있어서 거절하지 못한 요셉은 2년 동안 강의를 했다. 예쁜 여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요셉에게 뭔가 지도받기를 바라고 술자리에 따라오는 학생 중에 여학생들이 빠진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요셉은 곧 싫증이 났다. 젊은이들의 새로움은 짧았고 그것이 풍부한 변주로 이어질 만한 내적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새로운 것과 어린 것은 달랐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에는 그들은 서사가 빈약했다.
수업시간에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다룬 적이 있었다. 오랜 만에 남편의 무덤을 찾은 늙은 여자가 공동묘지의 관리인으로부터 무덤을 없앴다는 소식을 듣는다. 부지가 좁기 때문에 새로 들어온 시신을 위해 임대기간이 경과된 무덤은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눈물을 참는 장면이 이렇게 묘사된다. '그녀는 옛날에도 남편의 죽음을 막지 못했는데, 이제 남편의 두 번째 죽음 앞에서도 아무 힘없이 서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주검으로서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된 '늙은 주검'의 죽음 앞에 말이다.' 그 문장을 읽은 다음 요셉은 책에서 눈을 들어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때만 해도 머릿속에 규격대로 용지를 재단하는 형판 패턴을 적게 갖고 있었다. 그는 무덤에 들어간 뒤까지도 계속 늙어간 나머지 새로 죽은 젊은 주검에게 밀려나야 하는 늙은 주검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의 세계와 조우하는 순간의 젊은 영혼들의 전율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졸고 있는 학생 몇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러보니 반 이상이 마찬가지였고 강의실 안에는 가수면의 평화가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그 평화는 방금 그가 보여주려고 했던 늙은 주검의 죽음과 정확히 반대편에 있었다. 학생들의 나른한 표정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요셉은 돌연 가르치고 쓰는 일 전부에 격렬한 환멸을 느꼈다.
생각할수록 요셉은 이안을 만나기가 귀찮아졌다. 이안이 상의하겠다는 일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런 건 좋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려는 쪽으로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요셉은 또한 자기의 판단의 틀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반드시 좋지 않은 아이디어여야만 했다. 요셉이 이안을 만나기도 전에 그가 하려는 일이 잘 풀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은 그런 경위에서였다.
<창작과비평>2011 여름호 69-71
* '해요체'의 산문들을 읽고 난 뒤의 당황스러움 속에서 얼마 전 읽었던 이 소설이 생각났다. 장편 연재의 제1회.
제1부 이야기의 세계
1. 류의 서사
2. 요셉의 테마-늙은 주검의 죽음
3. 이채의 플롯과 요셉의 재구성
4. 이안의 주인공
5. 도경과 요셉의 대단원
이런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 이전에 내가 읽은 그녀의 소설은 <소년을 위로해 줘>였는데, 이 작품도 어딘가 웹상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 줘>도 은희경의 작품으로서는 낯설었다. 새로웠다?
그녀가 대단한 변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분위기가 산문집까지 이어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리고 이 연재의 1회를 읽고는 그녀의 '본령'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다.
이 '요셉'이라는 인물, 너무도 은희경적이랄까.
이 피곤하고 자잘한 분석들, 교훈들, 자기 법칙들. 그리고 이것들을 휘둘러 자기를 방어하느라 나머지는 돌볼 겨를이 없는 인물.
경험을 분석하고 축적하고 보편화하면 다시는 감정적으로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냉소주의자.
그래서 요셉은 이안을 만나기는 만날까? 그 자리에서 요셉이 생각한 대로 분위기는 흘러가고 이안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거절당하게 될까?
요셉과 같은 인물은 무엇 때문에 행동을 하게 될까.
(이 시점에서 사족으로, 얼마 전 봤던 영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주인공이 절로 연상된다. 돈에 눈먼 얍삽한 변호사 주인공은 자신의 그런 점을 잘 알고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려는 사람을 만나자 '그렇지 않은' 면모를 드러낸다. 요셉 또한 누군가 자신의 그런 성격을 파악한 다음 그것에 분노하거나 질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려 드는, 즉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는 작자를 만나면 자신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은희경 소설을 읽는 재미.
인용한 부분은 요셉이라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독자로서 나는 종종 '요셉이 어떤 사람이지?'를 따라가며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요설들'에 밑줄을 치곤 한다. 그녀의 소설에 깨알같이 박혀 있는 저 많은 경구와 아포리즘들. 그것이야말로 은희경의 전매 특허가 아니겠는가.
무튼, 한참 동안 잊고 있던(거의 전부 다 깡그리 잊고 있었지만) 은희경이라는 작가/여자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