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은은 2014. 10. 29. 13:44

* 아델은 자신의 특별한 욕망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한 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다. 그녀는,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특별히 위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 대부분과 달리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가장 따뜻한 색, 블루', '로렌스 애니웨이')

 

* 덮개기억...사소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을 유독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인 어떤 기억을 가리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 이 발견의 메시지는 "우리의 기억 작용이 예기치 못한 목적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얼마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잊고 싶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잊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 미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채고 버려진 진실이라면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서 계산을 끝내려 든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청포도 사탕:17년 전의 약속)

 

* 서사는 사건을 다룬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영화들이 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겪은 주인공이 그 일이 있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만 그 일은 사건이다.......사건은,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는 것을 놓고 간다. ('청포도 사탕:17년 전의 약속')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떠난다. ...도대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죽여버리기도 한다. 지금 나의 내면에도 누군가의 벨트, 누군가의 블라우스, 누군가의 구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잊었다. 잊지 않으면 그 미성숙한 공간을 떠나올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꽃이 제 색깔을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지금의 자신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어."('스토커')

 

* 흔히 이야기의 기본 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인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person이나 figure가 아니라 character다. 성격이 없으면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현자의 말마따나 '성격은 곧 운명'이어서, 특정한 성격 안에는 이미 특정한 이야기가 잠재돼 있기도 하다. ... 이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현행적인 것(the actual)이 된다. 작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특정한 성격 안에 잠재돼 있는 이야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현행화할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을 창조하는 일일 것이다.('라이프 오브 파이')

 

* 파이가 들려주는 두 이야기, 즉 신비로운 이야기와 끔찍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극 중 소설가는 주저하며 말한다. "이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군요." 그러자 파이는 '이미 벌어진 일에서 무슨 의미를 찾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두 이야기 모두에서 배는 침몰하고 파이는 가족을 잃는다. 의미를 어떻게 따진들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의미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그러고 나서 파이는 물음의 층위 자체를 바꿔버린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듭니까?"

...

우리는 과거의 체험을 어떤 식으로건 서사화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라이프 오브 파이)

 

우리는 그저 운명 혹은 신이 쓴 이야기 속의 힘없는 주인공으로서 태평양 위를 표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미 쓰인 이 이야기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이야기를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이야기도 그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 덕분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