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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르 마라이, <열정>

은은 2015. 9. 15. 12:59

지난 여름 읽다 남겨 두었던 새벽녘 부분을 마저 읽었다.

 

장군은 말한다.

나의 복수는 바로 그대가 사십일 년 만에 나를 찾아온 것이라고.

 

장군 생애의 두 사람, 친구와 아내가

우정과 사랑을, 그것은 바로 장군의 거의 전부를, 산산조각낸 다음

친구는 열대로 떠나고 아내는 남편과 연인이 떠나버린 빈집에 버려지고 장군은 아내를 버리고 사냥터의 별장으로 숨은 뒤 사십일 년 만에,

그날로부터 팔 년 뒤 남편의 침묵과 냉담 속에서 아내는 병을 앓다 죽고난 뒤에,

이루어진 친구 두 사람의 재회의 하룻밤.

어떤 절대적인 삼각 관계가(감정에 관계된 관계가) 벌어지고 말 때, 그것이 어떻게든 사람들을 뒤흔들며 그저 제 무늬를 수놓으며 지나갈 때,

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온전히 말해질 수가 없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러하다. 심지어 '온전히 말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싶어진다.)

그리고 배신당한 자, 피해자만이 그 순간을 떠맡아 창고지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장군이 마음 속으로 다듬고 다듬은 두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질문("그날 새벽 자네가 나를 총으로 쏘려고 했던 사실을 크리스티나도 이미 알고 있었나?")은 '그날 이후 나의 세월은 이런 지옥이었다네.'의 고백일 뿐이다.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운명에 희생양이 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짐작한다.

열대로 떠났던 콘라드는 그저 '지나는 길에' 호기심이 발동해 장군의 집을 들렀던 것이라고.

열대에서든 어디서든,

콘라드는 그 한동안의 일들을 쉽게 잊었을 거라고.

그러나 헨릭을 위하여, 사십일 년 간 산송장으로 늙어온 친구를 위하여,

그의 말을 밤새워 들어준 것이라고.

아마 새벽의 마차를 타고 장군의 집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곧 그날밤의 방문과 대화도 잊을 것이라고.

 

경제적인 작은 책 한 권이다.

2010년 2월에 찍은 1판 16쇄를 읽었는데 오자 하나 발견.

키로 까불고 체에 걸러 적절한 알곡들을 고른 것처럼 소설 한 편에서 모자라거나 쓸데없거나 넘치는 말이 없다.

그런 소설들이 가끔 있다. 말 하나를 더할 필요도 뺄 필요도 없는.

(번역되지 않은 원작에서도 그러할까. 참으로 궁금하나 평생 알 수 없으리라.)

 

인생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경제적인 책 한 권이다.

생을 통틀어 단 한순간.

자기를 잃을 만한 사건을 겪고 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자기를 용서하는가. 용서하지 못하는 채 어떻게 살아 있는가.

그 시간들도 의미가 있으며, 심지어 아름다울 수 있는가.

 

지적이고 섬세한 통찰, 아름다운 문장, 단순한 구성.

아무 때나 어느 페이지든 펼쳐 읽으면 지금과는 다른 부분에서,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리라.

언제든, 몇 번이든.

그때마다 감탄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리라.

그리고 콘라드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