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IRL ON THE TRAIN, 폴라 호킨스
재미있는 책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장르적으로 긴장감 넘치며, 이야기도 흥미롭고, 서정적이며(기차에 실려다니는 술주정뱅이 젊은 여인이라니!), 철학적 내공이 밑바닥에 잠복해 있다.
여자 인물들이 손톱이나 머리카락 같은 데부터 시작해 서서히 얼굴과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진행된다.
남자 인물 중에선 '톰'이 그렇군. 카말과 스콧은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변하는 복합적인 인물.
일기라는 형식은 '왜 그걸 이제와서 이렇게, 작가 마음대로 불쑥 얘기하는 것인가'라는 불만을 힘없게 만들 수 있다.
아이를 원했으나 임신이 되지 않아 망가지기 시작하여 이혼, 알콜 중독, 실직으로, 점점 더 추락하여 결국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를 곱씹으며, 그러나 매번 자기 자신에게 배신당하는 패배자가 되는 '레이첼' 캐릭터, 마음에 꼭 들더군. (나는 또 엉뚱하게도, 그래, 사람이 아무리 바닥을 헤매도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직시할 용기만 있으면 괜찮은 것이다, 같은 감상을 주절주절..)
감당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 도망다니는 '메건'에게도 연민과 공감을 느꼈다.
소주 반 병 정도 와인 두어 잔의 취기가 남아 있는 아침 눈떠서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좋았던 사실은
작가의 깨끗한 문체였다.(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의미와 권태, 잘디잔 파편들 투성이에, 마음이란 것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이렇게 상큼하고 질서 잡힌 문장들을, 그것들이 군더더기 없이 하나의 오브제를 구축해 나가는 것을 보는 즐거움,그러니까 숙련된 자의 완성도 높은 작업 과정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
그와 같은 세계를 구축해 내는 작가(들)에 대한 고마움...
그녀의 이력도 마음에 든다.
짐바브웨,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기자 노릇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