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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2016, 문학동네

은은 2017. 1. 6. 21:16

 

"어떻게 살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빚도 지고 남자들이랑 잠도 자면서 살았지. 그렇게 살면 이렇게 평안하고 재미있어진다. 사실 나만 재미있지 않고 송년회마다 만나는 애들 다 그렇게 재미있게 산다. 우리는 원래 스무살부터 재미있는 애들이었으니까. 나이가 들고 세상이 나빠져도 여전히 재미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구덩이만 보더라도 세실리아는 그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까. 가여운 세실리아. 그 마음 내가 전문이지. 밤은 오고 잠은 가고 곁에는 침묵뿐이고 머릿속은 시끄럽고 그러면서도 뭐 또렷하게 어떤 생각은 할 수 없어서 그냥 나 자신이 깡통처럼 텅 빈 채 살랑바람에도 요란하게 굴러다니는 느낌. 나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손은 아주 차가웠고 웬만한 남자 손만큼 컸다.

"난 네가 언제고 한번은 연락할 거라 생각했어. 근데 그게 왜 신년이야, 어떻게 갑자기 내 생각이 난 거야?"

친구들이 네 얘기를 하기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세실이라에겐 그 애들이 과연 친구인지 모르겠고, 친구들이 세실리아에 대해 한 얘기라곤 엉덩이밖에 없으니까. 애들이 내 얘기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날에는 정말 할말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치운이, 치운이가 이혼을 했단다."

세실리아는 표정이 좀 바뀐 채 뭔가를 생각했다.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내가 걔 얘기를 한 것이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의도가 있는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실리아는 "결혼한 줄도 몰랐는 걸, 나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긴 침묵이었다. 나는 무슨 닭요릿집이 이렇게 멀까,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가. 우리집으로 가서 오늘의 일을 잊기까지는 또 얼마나 멀 것인가."

---<세실리아>, 89-90

 

 

2. <너무 한낮의 연애>, <세실리아> 등 젊은이들의 연애 이야기(?)를 먼저 읽었다가 소설집에 실린 단편 <고기>를 읽었다. 눈앞이 밝아지는 것처럼 놀랐고, 이 작가를 둘러싼 호들갑들을 이해했다. 읽고 나자 이경미 감독의 작년 영화 <비밀은 없다>가 떠올랐고,

멋졌다. 90년대 문학도인 나로서는 거의 레이먼드 카버나 김승옥에 필적하는 완성도라고 생각했다. 이어 뒤의 단편 <개를 기다리는 일>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전반적인 현실 인식과 사유의 치밀함과 치열함(아, 이런 상투널널한 문구라니!)을, 사유의 반경과 깊이를 가늠해 볼 만하구나 싶었다.

놀라운 재능에 대해 인류가 유사 이래 그러했듯, 위안을 얻었고, 그쪽을 쳐다보며 물, 물! 하는 자세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

 

3. <조중균의 세계>, 그렇지, 이 단편 역시 일고를 요한다. (실린 작품들 하나하나가 일고를 요하긴 한다.)

대체로 '기성의' 문단, 대개 기성의 평론가들이 반색하는 이유에는 아마도, '지나간 세계'를 폐기 처분하지 않고 의미 부여해 주는 것이 눈물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든다. '조중균의 세계'를 돌아보고 발굴하는 젊은 소설가가 반가워서?

자신들의 역사가, 시간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굉장한 재기의 후생이 쓸어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