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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2018봄

은은 2018. 5. 24. 11:26

<<백민석 작가는 <교양과 광기의 일기>(한겨레출판, 2017)에서 이렇게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엔 가난뱅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가난뱅이도, 가난뱅이의 삶도, 가난뱅이의 문화도 등장하지 않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등장하는 여섯 주인공은 하나같이 중상류층 집안의 자식들이다. 그들은 가난을 모른다. 그들도 상실을 경험하지만 잃는 건 시간이지 재산이 아니다. 주인공 쓰쿠루도 부동산 재벌의 아들이다. 영혼의 색채는 없지만 돈은 있다."(18쪽)

가난뱅이가 나오지 않는 소설에도 그 소설만의 리얼리티가 있겠지만 저 문장들에는 썩 날카로운 데가 있다. 우아하고 세련된 세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거칠고 비천하기까지 한 어떤 세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후자의 세계로부터 비롯된 소설에는 전자의 세계로부터 비롯된 소설이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어떤 리얼리티가 생기는 것이다. 거칠고 비천한 세계를 다루는 소설이 드물지 않지만 그러한 세계는 관찰과 표현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오히려 추상적으로 이해되거나,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바람에 오히려 스타일화되어 표현되거나 반대로 어떤 단순화된 전형성에 머물게 되거나.

거칠고 비천한 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관찰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세계로부터 비롯되는 것과는 다르다. 앞에서 '건드릴 수 없는 어떤 리얼리티' 운운한 것은 오직 비천한 세계로부터 비롯된 소설에만 해당할 것이다.......이주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감각적으로 하층민인 자들이 모종의 품위를 가망 없이 잃었으면서도 스스로를 연민하지도 자학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끝까지 잃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가망 없음이 낭만적으로 처리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x그럼에도의 세계.>>

 

문학동네 이번 봄호에 권희철이 쓴 소설 단행본 감상평을 읽다가.

가난한 사람들은 그 존재가 모두 지워져 버린 세상에서,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가질 수 있는 '미학'이 무엇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박민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쓰지만, 그의 문체는 너무나 부티 나는 것이어서, 그것에 대한 윤리적 고찰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했던, 그러면서 가난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미학은 기껏해야 '침묵'이 아닐까 생각했던...

이주란 <모두 다른 아버지>란 책을 읽어 봐야겠다.

 

** 후자의 세계를 다룰 때에만 '리얼리티'가 생긴다고 할 때, '리얼리티'의 의미를 이 사람은 어떻게 쓰고 있는지?

---->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후자의 세계를 '다룰' 때가 아니라 후자의 세계로부터 '비롯될' 때라고 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