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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은은 2010. 5. 22. 18:46

이런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듯이 한강은 느리고 여린 문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여리고 느린 것들도 싸우고 살아 내야 한다는 듯이 소설의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생전에 관계한 몇몇 사람들 속에서 치러질 뿐이다. 보통 자식을 뒤에 남기지만, 예술가들은 작품을 남긴다. (자식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읽고 느낀 기록이 아니고, 작품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읽고 느끼고 거기에 자기를 적어 넣은 기록이다.)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삶을 타인은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죽은 사람 자신은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렇게 객관적인 거리에서밖에 나는 생각을 못 하겠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라면 얘기의 색채가 달라질 것일 터이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러하다. 죽은 사람의 마음 속을 샅샅이 훑어서 어떤 곳으로 걸어갔는지를 밝히려고 한다.
구태의연한 몇 가지 화소들을 가지고 얼개를 얽고, 그 사이사이를 여전히 곱고 찰진 문체로 핍진한 마음들을 그렸다.
엉뚱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김혜리 기자의 문체가 이 여인의 문체와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좋은 비유들과 예리한 성찰들이 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끝에서 돌아와야 하는 사람의 독백에 마음이 끌렸다.

"------민서 못 만나고 지낸 몇 달 동안 다 끝났다고 생각했어.
남김없이 파괴됐다고, 완전하게 죽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어.
그때 내가 정말로 죽었던 거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죽기 전의 어딘가로 돌아갈 수는 없어. 되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어. 난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다시 시작하는 게 가능하다면-----정말 가능하다면 말이야. 뭔가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부숴야 하는 것 같아.
아니, 그건 달라.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부숴야 하는 거야.
누군가가 지금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말해. 지금까지 내가 그렸던 그림들------ 살아 내려고 어떻게든 존재해내려고 필사적으로 그렸던 모든 것들이, 다 가짜라고.

아니, 아무것도 안 무서워.
아무것도 후회 안 해.
지금부터 시작이야."   
(323~324)

혹은 끝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의 다음과 같은 독백.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 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