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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소설집 <일곱시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해설(서영채)에서

은은 2011. 1. 25. 22:22



 
황정은의 환상이 지니고 있는 독특성은 명랑성과 비애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견길 수 없는 고통이나 깊은 슬픔과는 달리, 비애는 우리가 일상인으로서 살아감에 있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체념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상태로부터, 즉 부조리한 세계 상태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 불가피성 때문에 오히려 그런 상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버리려고 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명랑성이 만들어진다. 비애와 명랑성이 이런 방식으로 결합되는 지점에서 황정은 특유의 환상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은 황정은의 서사적 감수성이 지니고 있는 저 실없는 명랑성 때문인데, 이것은 카프카나 플라톤의 경우처럼 일종의 마조히즘적인 유머로 읽힌다. 그것은 곧,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는 현실의 질서 앞에서 자진하여 그 현실적 질서의 일부가 되고 짐짓 그 질서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그것의 불합리함을 비웃는 것, 즉 자진하여 합법적으로 우스꽝스러워짐으로써 오히려 합법성을 조롱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근본적인 힘의 소재처이다. 이야기는 일상적인 흐름과 다른 힘의 흐름이 조우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현재의 세계에 대한 타자성과 외부성이 확보되는 순간 일상의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거기에서 이야기의 힘이 태동한다. 그러니 문제는 그 타자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작가들의 개성에 따라 제각각이겠지만, 거친 방식으로나마 시대적인 차이에 대해서 언급해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80년대는 사회 내부에 정치적 혹은 윤리적 정당성이라는 거대한 균열선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서사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또 90년대는 탈이념적인 세계 상태 속에서 비로소 문제 삼기 시작한 개인의 사적 진정성이 서사의 주된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2000년대는 어떠한가. 이 새로운 중세에, 노골적인 속물들의 시대에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 것인가. 흥미와 교훈의 대상인 이야기뿐 아니라, 삶의 의미를 문제삼는 것으로서의 소설이 어떻게 자기 존재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황정은은 이국의 이야기도 역사 이야기도 아닌 어떤 것, 현재의 일상으로의 여행이라 할 만한 어떤 것을 내놓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환상이라는 요소도 일상을 여행지로 동원하기 위해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환상이라는 장치를 걷어 버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일곱시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는 평범한 소풍 이야기가, 분열증이나 망상쯤에 해당하는 이상 심리의 공간의 틈입에 의해 갑자기 낯선 세계로 전환되어 버린다. 이 두 개의 서사세계 모두 우리의 일상이 지니고 있는 불모성과 황페함을 기저에 깔고 있지만, 그것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황정은의 시선과 기술 방식은 그런 황폐함을 명랑성으로 도포해 버린다. 

 황정은의 명랑성은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감각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그의 환상과 유머를 떠올려 보자. 이전 시대 서사의 풍자나 골계, 익살 등이 지니고 있던 강렬함이나 절박함과 구분되는 그것은, 마치 외부의 자극에 대한 오뚝이의 반응과도 같은, 심드렁하고 무뚝뚝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명랑성이다. 평범할 뿐인 일상은 그런 서사적 감각과 만남으로써 한 겹의 코팅막이 입혀지고 그럼으로써 황정은풍이라 할 만한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견인된다. 이런 점에서 황정은의 명랑성은 그 이전의 문학 세대가 지니고 있던 격렬함이나 절실함의 대체물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서사를 가장 원초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하기의 충동 혹은 미메시스의 충동을 드러내는 일이 그것일 것이다.

 추한 것은 불쾌하지만 추한 것에 대한 미메시스는 유쾌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을 때, 우리는 그의 말에 덧붙여서, 추한 것에 대한 미메시스는 대상의 추함과 미메시스의 유쾌함 사이에서 정서적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충동은 그 바깥에서 보면 이물스러운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지 않는 즐김의 산물이다. 



!!
황정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세계,라기보다 황정은이 도무지 그 속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거기에 자리잡음으로써 할 말의 전부를 하고 있는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세계를 '추함'으로 전재해 버리는 이 비평이라니.
!!!
황정은의 환상이 '명랑'하게 느껴지던가? 저 <백의 그림자>에 덧붙인 신형철 평론가의 한 구절을 잘 음미해 보시길 권하고 싶다. 현실에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극한점에서 솟아오르는 환상은 그러므로 오히려 '극사실'이 아니겠느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