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내 문제가 궁금하고 그로 인해 생성되는 ‘삶의 화학’에 골몰하는 편이다. 내게 인생의 절정, 결정적 순간은 패배 후의 복기다. 무엇인가 잘못되었을 때, 혼돈과 의문의 시간에 바로 복기할 수 있다면! 그 깨달음의 절실함과 기쁨을 어디에 비교할까. 집약된 배움, 농축된 시간. 바둑의 복기는 요다 노리모토 9단의 휘호처럼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 다시 오지 않을 단 한번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삶은 복기의 연속이다. 그래야 한다. 매 순간이 대국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복기는 트라우마, 집착, 후회를 가져온다. 지나간 일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이창호 지음, 손종수 정리, 라이프맵, 2011
-고통은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린다. 신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진 인간은 고통으로 인해 온전해진다.(146쪽) 책의 요지는 고통은 피할 수만 있다면 겪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무의미하지만, 어차피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 이런 종류의 인생사는 의미 추구만이 답이다. 고통의 가치는 오로지 해석에 달려 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2014.12.19)
<고통의 문제>, c.s.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홍성사, 2002
-지금도 이 구절에 동의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한 나의 관심사는 비판이란 무엇인가이다. 그전에는 여성에게 해석은 곧 변혁이므로 나만의 언어를 갖는 것에 몰두했다. “서구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표현을 조롱했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이 마르크스의 주석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중 하나가 이 문장이다. 현실(present)과 현실의 재현(re-present)과의 관계, 즉 사회 변화에서 언어(담론)의 ‘역할’은 영원한 논쟁거리다. 이 격렬한 구절은 숭배받았고 또 그만큼 비판에 시달렸다.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은 ~ ”.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이 관용구의 운명은 자기 논리에 의해 자신도 부정된다는 사실이다. 파생(派生)된 것은 바다를 이루고 파도가 되어 ‘기원’을 삼켜버리기 마련.
이 구절은 마르크스주의의 위업과 한계의 절정을 상징한다. 그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언어가 길이 끊어졌음을 알고 웃었을 것이다. 알튀세르, 푸코, 라클라우나 스피박, 무페, 버틀러 같은 일군의 페미니즘은 보완이든 비판이든 상호 비판이든 마르크스의 길을 연결한 공신들이다. 이들의 요지는 해석과 변혁은 분리되지 않으며, 다르게 해석하는 행위가 곧 변혁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포함 모든 철학은 변화를 위한 것이다. 해석이 곧 실천임은 당연한 이야기고 문제는 누구의 해석이냐, 그것을 누가 대표로 말할 수 있는가다. 또한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변형된다. 투명한 언어는 없다. 사실, 인간은 언어로 말하지도 않는다. 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3~7%. 나머지는 몸이 말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스무살 때부터 나는 변화는 곧 비판이며 비판은 곧 저항이고 저항은 무조건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 문장에는 비판이라는 표현도 없는데… 비판, 저항, 방어(자기 합리화)가 모두 같은 행위였으니 끔찍한 일이다. ‘변화시켜야 할 대상’은 마치 분노처럼, 타인을 향할 때 폭력이고 나를 향할 때 우울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엔 폭력적이었고 지금은 우울한 것일까.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양재혁 옮김, 돌베게, 1987
-한국 현대사에서 <목민심서>와 가장 충돌하는 대통령은 누구일까.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보다’ 이명박, 박근혜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은 독특하다. 박정희에서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은 공과와 집권 과정이 어쨌든 간에 ‘국가 비전’을 선포했고 국민들과 격렬한 상호 작용을 주고받았다. 학살도 탄압도 민생고도 흔했지만 애증과 갈등이 있었다. 국민들 역시 호오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 두 정권은 ‘쿨’하다. 이론적으로 “억압에서 방치로 통치 방식의 변화”라고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두 대통령의 직무 수행 스타일은 그 흔한 대의는커녕 직업 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마치 “이런 것도 한번 해보자”는 식의 개인적 자아실현, ‘코스프레’에 가깝다. 대통령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 놀이를 하는 것 같다. 국민으로 인한 충격이나 상처가 없고 여론도 아우성이든 통곡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익 없는 잦은 외유가 그 결정(結晶)이다.
마음이 없는 리더. 그런 리더를 선택하는 사회. 두렵고 심각한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미 극소수는 양극화를 넘어 다른 공간에 산다. 그들의 대통령에겐 심서가 필요없다.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이을호 옮김, 현암사, 1972
'수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년 10월)에서-1 (0) | 2015.02.04 |
---|---|
2014년 10월 17일자 한겨레 정희진의 어떤 메모 (0) | 2015.01.11 |
황정은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0) | 2015.01.09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0) | 2015.01.08 |
황인숙 시선집 (0) | 2014.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