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않는 인간,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욱 힘차고 고마운, 고통받는 인간을 견디게 하는 분노, 저주, 복수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용서라는 피해자의 권한마저 빼앗아버린 신.(44)
고통의 감정은 물질이다. 달리 해석될지라도, 크기가 작아질지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있다. 가해자의 몸은 고통의 경험이 없으므로 온갖 절대자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대로 구원, 용서, 평화라는 관념의 향연을 주관할 수 있다. ...
반면 피해자의 구원은 '고문하는 자'도 피해자도 지칠 만큼 고문의 노동이 지난 후, 잠시 들이마시는 숨 같은 것일지 모른다....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분노는 개인의 마음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권력 관계다.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피해자의 분노는 관리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헤아림, 깊이 있는 지성의 영역에 놓여야 한다.
가해자와 사회는 자신이 져야 할 짐을 피해자의 어깨에 옮겨 놓고, 불가능을 감상한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45) --이청준 <벌레 이야기>
* 차별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배려한다. 그래서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는 분열된다. 또 분열되어야만 한다. 모든 말하기, 글쓰기가 협상인 이유다. 원래 이 자아 분열 개념은 나치 학살의 생존자들이 자기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자아를 조정하는 고통에서 발전했다. ...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말의 수위와 표현을 달라진다. 조정하지 못하는/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신이 너무 순수해서 아픈 이들이요, 다른 하나는 전현직 대통령처럼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권력자다.
나는 증언 형태의 책을 읽을 때 말하는 사람의 갈등을 가장 주의깊게 살핀다. ... 말하는 사람은 차별 경험을 본질적 자아로 환원하지 않으며... (54)--<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그러나 사람이 열 명 있다면 평화 개념도 열 가지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나의 평화는 타인의 노동 위에 있으며 '그들'의 이익은 '우리'에겐 폭력인 현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정의는 성립하기 어렵다. ...
나약함, 병듦, 낙오, 패배, 거부당함, 지속되는 슬픔, 버려짐, 오랜 망설임, 무기력, 우울, 의존, 좌절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상태가 긍정되는 경우는 극복했을 때뿐인데, 이는 곧 생존과 번영으로 여겨진다. 극복은 원래 상태 혹은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회복(回復)을 뜻하는데, 이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극복은 실상은 회피를 의미한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라는 목소리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간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前奏)다.(58)--<상실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외
*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놀랐다. '자기가 태어났고' 그래서 '죄송하다'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에 죄송하다는 메시아적 죄책감. 이 어마어마한 자의식과 이를 따르지 못하는 자신. 근대 주체성의 위태로운 산정(山頂). 지식인의 자의식은 그를 서서히, 낭만적으로 살해했다.
살려면, 기대를 낮춰야 한다. '글을 쓸 수 없어 죽는다'는 건 '생명 경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다. 삶의 매순간이 의미, 호기심, 열정의 연속이라고 믿는다면 '재능 없는 천재'의 좌절, 자기모순, 동반 자살 실패의 죄의식, 경멸하는 인간들과의 경쟁, 심지어 패배......, 이건 삶이 아니다. 그의 영원한 인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이다.(65) -- '이십세기 기수',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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