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발견한 것은 제 속에서 아직도 울고 있는 아기였습니다. 두 살배기의 나. 그것이 제 생의 첫 기억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일어나 소스라치게 놀란 채로 울고 있는 아기.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도무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악을 쓰며 울고 있는 그 아기.
먼저 그 아기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사랑으로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그리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뽀송뽀송한 이불을 덮어준 다음 다시 아기를 재워야 한다고. 결코 자신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처음으로 저는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네까짓 게 뭔데 내 고민을 알기나 알아, 하는 오만도 사라지더군요. 글쎄요. 그것은 오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오만이라기보다 서글픔에 가까웠을 겁니다.
이제 이 세상의 누구도 믿지 않겠다던, 결코 내 힘으로는 가 닿지 못할 소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아기는 제 마음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거기서 그대로 잠들어 있더군요. 다만 울음 끝에 잠든 아기가 그렇듯, 잠결에 무심코 턱 끝에 남아 있는 울음을 부르르 떨어낼 때마다 제 마음도 흔들립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것은 바로 게으름 때문이라고요. 진실과 마주 서지 않으려는 회피, 정직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마와 자신의 코와 자신의 입술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게으름이 바로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정작 저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가 본 것은 대체 누구였을까요.
---(59-60)
이제 여행을 마칩니다.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더군요. 침묵은 침묵이 아니며, 말은 말이 아니더군요.
그동안의 나는 침묵은 그저 무일뿐, 아무것도 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초조한 나날들을 보냈는지요.
헤어짐은 내 살점을 찢어내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토록 뱉어놓고 부끄러움 때문에 거리를 걸으면서 토할 것만 같은 시간들도 지나갔습니다.
아아, 나는 드디어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변화를 이토록 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내는 것이 서글프지만, 대가를 치르고도 변화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거라고 특유의 낙관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마치 잘라내도 뿌리만 있으면 다시 돋아나오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내 가슴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생각들.
내 인생 만 33년하고도 4개월 동안, 그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진정한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때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면서 저지른 일들, 내가 준 상처들---
그러니 이제 남은 33년은 그것을 수습하면서 보내야 하리라는 생각.
그것이 설사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이라 해도 나는 너무 많은 일들을 저질렀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깨닫습니다. 언제까지 말썽꾸러기로 남아서 사람들에게 놀라운 구경거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내가 나의 인생 초반에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는 동안 만일 나에게 남은 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받으면 좋고 받지 않아도 하는 수 없으리라는 생각. 나의 이 생각이 부디 확고해지기를, 부디 오래도록 남아서 내 마음의 대들보가 되기를.
---(95-96)
너무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거든, 그 생각들이 그야말로 네 머릿속에서 폭발하도록 그저 내버려두렴. 흙탕물이 가라앉도록 홍수의 그 거칠고 품위 없는 물결이 너를 휩쓸고 가지 않도록. 소리 내는 물결은 마실 수 없다. 우리를 살찌우는 것은 조용히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 혹은 소리 나지 않고 솟아나오는 샘물이다.
그래, 이제 그만 인정하기로 하자. 더한 행복, 어떤 반전은 이제 그만 끝나버렸다고 때로 체념 속에 너를 맡겨 보려무나. 이제 너는 고요 속에서 기다리는 일.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맡기고, 생이 너에게 충분히 허락해서 익히고 있는 일들을, 그것이 익기 전에 따버림으로써 훼손시키지 말도록 하자. 그래...때로는 체념할 줄 아는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지금의 너보다 더 고통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란다. 해야 할 체념을 하지 못하고 지나온 그 많은 날들 때문에 내가 훼손시켰던 사람들.------
그리하면 아마도 너는 진정 너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토록 귀중한 너만이 그에게든 아니면 다른 그에게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재잘거렸던 영특한 지혜를 이제는 너 자신을 위해 쓰렴. 네가 귀중해지면 누구든 네게로 돌아온다. 그가 아니라면 더 귀중한 무엇이 돌아온단다. 이건 내가 약속할게.
---(173-174)
공지영 산문집 <상처 없는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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