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문득 손에 잡힌 책

은은 2011. 8. 25. 15:04

"있음이 있음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다만 무너지고 썩고 더럽혀질 뿐. 아찔한 높이. 깊은 강. 네 둘레를 또 한 차례 지나가는 부재(不在)의 바람. 그 지나감이 있음이듯이, 네가 알지 못함이 또한 있음이니, 빨리 지나가는 것 앞에선 너 또한 빨리 지나가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무엇이 무심결에 나자빠진다."

"관념에서 사물로! 이것이 사랑이며, 괴로움이며, 괴로움 다음에 오는 행동이며, 초월을 정당화하는 길이다."

"무엇을 버려도 그것은 버려지지 않는다. 다만 버리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것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음이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선을 다하여 더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육체의 죽음이든 마음의 죽음이든, 죽음이 먼저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학동네 2001, 이성복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불현듯 틀림없이 가을이 온 어느 날 평소처럼 클래식 에프엠을 듣던 우리는 "가을이 되면 갑자기 음악이 더 잘 들리는 것 같아."라고 말하며 서로 고개를 끄덕였지.
어제 엠비씨 에프엠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배철수 씨가 말하길,
'날이 선선해지면 음악이 좀더 잘 들리게 되죠. 특히 추억이 담긴 노래들이 그런 것 같아요.'

*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선을 다하여 더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내 깜냥을 넘어서는 삶의 흐름 같은 것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자기 깜냥을 버리고 그냥 그 흐름대로 맡기고 흘러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에고나 자의식 같은 것들 다 내버린 채, 바보처럼. 여기에는 온갖 원초적이고 유치한 감정들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그대로, 그것을 나로 인정하고 원초적이고 유치한 사람이 되는 것도 포함된다. 오히려 더 실컷 그렇게 할수록 거기서 벗어나기도 수월한 것 같다.
조각난 트윗 멘션에서 '어쨌든 한 인간이 성숙해지는 것은 운명이다.' 뭐 이 비슷한 문장을 읽었다. 누군가 공지영 여사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었다. 진실이기에 시원하고 편안해지는 발견이다. 어쨌든 한 생을 계속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성숙해지지 않는 것이 도리어 힘든 일인 것이다.

* 내가 도저히 용서 못 해 괴로운 과거의 나 ;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혐오스럽게 사랑을 구걸한 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자신을 들키고 만 나.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동정 섞인 경멸의 대상이 되도록 자기를 망친 나.
내가 몰랐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 무엇인가,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그 당시의 내 나이쯤이면 당연히 알고 있는 형언되지 않는 어떤 법칙, 진실, 관계의 규칙 같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토록 전락했던 것일 터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가까운 타인일지라도 궁극의 순간 모두 자기 자신을 지킬 뿐이며, 지킬 수 있을 뿐이며, 자신을 버리고 대신 타인을 지켜주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우선 이 엄연한 진실을 인정한 뒤에, 우정(이든 뭐든)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 엄연한 진실에 너무 크게 다쳐 자기 속으로 미친 듯이 움츠러들어 버린 채, 다시는 어떤 관계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내가, 이제는 조금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여기는 용기를 내어 봐야 할 지점인지도 모른다. 진짜 '관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살려내어서.

그때 차라리 낯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벌거벗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때 나는 도대체 왜 그 소도시의 사람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무턱대고 믿었던 것일까...

지나간 일은 수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어찌할 수가 없다!'
한 가지 가능한 일은, 그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재진술하여, 내가 '세계'라고 느낄 만한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이다. 동정 섞인 경멸 대신 인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건, 자기 자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타인(세상)이 봐 주고 알아 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상처의 치유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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