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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 2015

은은 2016. 10. 17. 12:51

더 이상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

여행이 자기와 세계와의 거리 확보를 통한 자기 경계 만져 보기라고 한다면.

다른 공간으로 나를 옮겨 확장된 실존을 경험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스마트폰의 셀카 촬영 소리와 SNS  의 알림음이 들리지 않는 곳, 세계적 프랜차이즈 가게의 간판을 하나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남은 곳 중 한 곳, 그리고 나날이 더럽혀지고 있는 지역이 중앙아시아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장소로의 여행을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을 절반 넘게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어느 지점 이전의 세대는 스마트폰과 프랜차이즈 기업의 로고와 에스엔에스가 그들의 세포를 이루고 있을 터이므로.

배수아는 지나가는 문장 속에 써 놓았다.

알타이로의 여행이 의사 자살이었음을.

그렇지만, 그녀를 그곳으로 몰아간 충동이 죽음에의 그것이었을지라도, 기록하는 자로서의 그녀가 입고 있는 태생의 스타일, 그러니까 자신의 의식과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세계를 가공하는 시점과 문체는 그녀의 그런 충동을 익숙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그녀는 살던 대로 살 듯이, 쓰던 대로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고 싶은 생각에 대해, 삶과 죽음의 격절 그대로가 투영된 새 문체를 발견할 수는 없다.

지금껏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죽음을, 죽음에의 절절한 욕망을, 유행가 이외의 방법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 

압도적인 환경의 변화 속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죽고 싶은 마음뿐이던 이전의 자기로부터 멀어질 수는 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그 전환이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원시적 풍광, 환경 친화적 생활 방식, 다른 인류와의 조우 그 어느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