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여행기인 줄 알고 두 번 펴보지도 않고 샀는데, 알고 보니 옛날, 지금은 관심도 없는 파리와 서유럽 이야기.
<서문>에서
-상하이에서 우리는 장제스의 가옥 한 곳에 머물렀다. 안방 목욕탕에 비데가 딸렸고 이발 의자도 설치되어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한창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중국을 휩쓸어 신문은 매일 위안화 대 달러의 비율을 새롭게 찍어 냈다. 일곱 자리의 숫자가 하룻밤 새 5만 단위로 뛰었다. 호텔 식당의 식탁보는 흰색이었고, 웨이터는 신선한 딸기를 가져다 주었다. 바깥 먼지 낀 광장엔 릭샤 무리가 버려진 듯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밤이든 낮이든 호텔 계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움직임이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평생 이름을 알게 될 리 없는 남자들이 릭샤 밑에서 자고 있다가도 하루 1달러에 고용하면 일어나 긴 막대 사이에서 종종 걸음으로 움직여 어디든, 심지어 도시 바깥으로도 데려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이름을 들어 본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는 폴 볼스(Paul Bowles, 1910~1999. 미국 소설가이자 작곡가로 아프리카를 소재로 글을 썼다)를 읽고 탕헤르에 갔다. 물론 탕헤르는 책에서 말하는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백사장의 모래마저 더러워 보이는 지저분한 도시였다.
제임스 설터의 문체.
영원과 우주의 프리즘으로 현재를 본 통찰을, 순간적으로 쓴 것 같은 가벼운 문장에 담아내는 문체.
문체는 역시 세계와 삶에 대한 자세이다. 이 사람은 192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죽었고, 이 여행 산문집에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일들이 나오는데(그때 겪은 일들, 그러나 쓴 것은 언제인지 확인이 필요하지만), 30대 전후라고 치고, 그 무렵 삶을 대하는 가볍고 날렵한 발걸음과 몸짓들.
그와 같은 문체.
니체, 페소아, 이상, 백석, 박완서, 김혜리, 쉼보르스카, 나보코프, 알랭 드 보통, 미셸 투르니에, 김수영, 황동규, 기형도, 정희진, 은유, 강석경, 황정은...
이런 사람들의 글들을 얼핏 훑어 가며, 그 문체가 어떠했던가를 가늠해 보고.
요즘은 웹툰체나 에스엔에스체라고나 할 수 있을 문체들...
그리고 경전의 문체..
어찌되었든, 이 세상이란 물 위를 유한한 시간의 배를 저어 가며 남기는 무늬들..
어떤 사람은 요리책을 내고, 어떤 사람은 우울한 영혼들에 대한 보고서를 낸다.
흥미 없는 파리 부분은 건너뛰며 읽고 있다.
어쨌거나 <먼 북소리> 이후로 사진 없는 '명문장'의 여행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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