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170808 영풍문고 스타벅스

은은 2017. 8. 8. 13:47

1. 유치원 열흘 정도 방학을 원주에서 빈둥하다 돌아왔다.

계획에 없이 며칠 더 머무는 바람에 여행도, 이벤트도 없이 말 그대로 게으르게 하루하루.

장마 뒤의 폭염을 에어컨 없이 지나는 외할머니 덕에 딸과 나도 선풍기 바람 하나로 '여름의 옛날맛'을 야금야금 핥아 보며.

아파트 근처 물놀이 공원에서 잠깐 놀고, 수영복 차림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할머니가 차려 주시는 밥과 간식을 먹고, 크게 새로 지은 시립중앙도서관 어린이 열람실로 피서를 갔다가 왔다가 하며 하루씩.

아파트 화단에 핀 봉숭아 꽃 따서 손톱 발톱에 물도 들였다.

원주에서 나는 고등학교 3년(정확히 2년 반)을 다녔지만,

'지만'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려고 했는데,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군.

대학 입학과 함께 나는 원주를 떠났지만 본가와 친척들이 원주에 있어서 지금까지 원주는 점점 고향 같은 것이 되어 온 것 같다.

'서서히'.

결혼 이후에는 어쨌든 친정, 출산 이후에는 어쨌든 아이의 외가가 되었다.

원주에서는 늘 여행자 같고, 엄마의 아파트 한 채와 그 주변의 마트, 가까운 공원, 도서관, 병원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해야 좋을지를 모른다.

그리고 원주에는 고모 두 분을 빼고는 만날 사람이 없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겠지만 소식을 모르거나, 연락하지 않는다.

소도시에 터를 잡고 사는 국민학교, 중학교 동창들도 찾아보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 아웃사이더니까.

원주에 별난 애착은 없지만 아파트 문 열면 마주 보이는 여름 치악산과, 제천 내려가는 국도 주변의 첩첩 산 풍경은 좋다.

'나와 원주'의 진짜 이야기는 아마 '나와 가족(엄마)'의 이야기이리라.

 

2. 더위에 침범당한 흐릿한 정신으로 겨우겨우 최정화 단편 소설들을 읽었다.

<지극히 내성적인>에 실린 첫 번째 단편 '구두'는 따끔, 하는 맛이 있었다.

두어 달(2년인가?) 요양 차 지방 도시로 내려가게 된 중산층 주부가 그동안 남편과 아이들, 가사를 돌볼 가사도우미 면접을 보는 이야기인데, 중산층 주부의 망상적인 피해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심리가 어떤 것인지 훤히 잘 이해하며, 그녀를 옹호하려 애쓰며 읽었다.

뒤의 단편들은 좀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들도 있었는데, '팜비치'가 좋았다.

제목을 따 온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억지스러웠고, 책이 없어 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겨우겨우라도, 한 사람이 만들어 낸 한 세계나마 휴가 동안 다녀왔다.

시간이 좀 더 날 것 같아 북새통 서점에서 조해진의 장편소설(<여름을 지나간다>)을 구입했으나 앞부분 몇 장 읽고 상경하게 됐다.

상경 후에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트위터만 들여다 본다.

몇 장밖에 안 읽었지만 조해진의 현실 감각이 휠씬 낭만적이란 판단.

 

3. 있는 듯 없는 듯 마음에 남아 있던 한 댓글을 끄집어내 십 년? 만의 지인에게 연락하여 만나 점심을 먹었다.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 나이에 성적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 남녀의 만남이 얼마나 맥없는지 알았고, 고마웠다며 만나자고 한 자가 맥주 한 잔 값을 아낀 걸 후회했다.

아무튼, 그때 그런 댓글 한 줄을 남겨 줘서 고마웠다. 두고두고 못 잊을 만큼.

그랬다고 이야기 하니 '정말 힘들었나 보네?!'하는 반응.

 

4. &

8월 새로 배정 받은 영어회화 수업을 오늘 처음 들어갔는데, 맙소사스런 이 기분을 어쩐담.

젊은 청년 셋과 젊은 여자 하나가 체구가 작은 선생님과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청년들은 저희들끼리 친구인지,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지, 일 주일 학원 수업 들으며 친해진 사이인지 모르겠으나 그 눈빛과 태도가...그렇게 납작하고 척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영어는 조금씩들 한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우선 나의 태도를 돌아보며 차근히 생각해 볼 생각이지만, 그 육체 속에 자기자신이라고는 말라비틀어진 지푸라기만큼도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세상에 나와서 단 한순간도 머리를 들어 위를 쳐다본 적 없는 자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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