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20240107_릴리슈슈의 모든 것

은은 2024. 1. 7. 13:24

 

정희진 선생님의 영화 감상문집 <혼자서 본 영화>에 이 영화가 들어 있어 와챠에서 찾아보았고.

어제는 도서관에서 8시쯤 나서는데 참 아름답게 눈이 내리고 있어서 한참 서서 보았고,

집에 들어가기 전 어딘가 맥줏집에서 생맥주를 한 잔 마시면 좋겠다 생각하다 알맞은 정류장들을 다 놓쳤고,

눈길이 미끄러워 언덕배기 마지막 길을 올라가지 못하겠다는 버스에서 내려(사실 얼마전 그 언덕길은 열선을 까는 공사를 끝냈기에, 그리고 잠시 풍성히 내리고 만 눈은 이미 다 녹아 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라면을 사들고 들어갔고. 마치 길들여진 개 같다고 생각했고.

 

선생님은 영화 감독을 천재라 극찬하시며 이 영화가 영화의 끝이라는 식으로 써놓으신 것 같은데,

그리고 '가슴이 아플 것'이라고 한 친구의 말대로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하셨고,

그리고 이 영화의 전체 중 일본 남녀 공학 중학교의 말하자면 '일진'들이 같은 반의 여자애들을 강간하고 그것을 비디오로 촬영한 다음 그 아이들을 원조 교제 성매매 시켜 돈을 버는 대목만 집중하셨는데,

선생님의 가슴 아픔은 아마 꽃 같은 여중생들의 세계가 짓밟히는 것을 보는 아픔이었을 것 같은데,

나는 가슴이 아프지 않아서 이 일을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그 장면을 보았고, 그러나 찬찬히 다 보고 싶지는 않아서

몇 분 간을 건너뛰어서 보았고,

그리고 '살이 쪄서 뚱뚱해지면 이 일을 안 해도 될까?' 하던 예쁜 여자 친구는 떨어져 죽고,

뭐뭐뭐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분명하게 흘러가고 끝이 난다.

이 영화는 2005년에 개봉했고, 생각보다 이와이 슌지는 우리 세대 사람이구나 싶고,

찾아보니 올해 60, 1999년에 데뷔 했는데 그 해 <러브 레터>를 만들었네..

이후로도 영화 감독으로서 살아 온 것 같은데 필모에서 제목을 들어본 영화는 서너 편 정도네..

이 영화는 릴리 슈슈 음악에 대한 뮤직비디오쯤 되는 것 같고,

죽음, 가벼움, 허무가 있고,

감독의 천재적인 감각이 기쁨을 주었고,

이를테면 구제 불능의 중학생 패거리들이 오키나와를 가서

밤바다에서 튀어오른 동갈치에 습격당하는 장면 등 오키나와 여행의 전체, 등은

이 감독의 감각의 세계가 얼마나 우주적이고 그래서 여기 이 현실 속에 묶여 있어야 하는 삶들이,

그리고 음악이, 그리고 중학생의 나이라는 그 시절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고.

확실히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적인 데가 있고,

그 가벼움 덧없음이 아름답고,

이 감독이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그들이 모두 사랑하는, 그들의 신 '릴리 슈슈'의 음악을

벼가 무성한 그냥 시골 논 한가운데 서서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를 한 손에 들고 듣는 교복 입은 중학생 소년 주인공 그대로 보여 준 것.

영화에 등장하는 피아노 곡이 드뷔시라는 점도 천재적으로 어울리고.

나는 이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장면들이,

마음 아프지 않았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 수도, 잘못 살아서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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