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도토리 까불기

은은 2015. 10. 19. 13:07

추석 성묘갈 즈음이 되어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주우러 산으로 간다. 산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으로 간다. 도토리들은 모자를 쓴 채 떨어지기도 하고 모자를 벗고 떨어지기도 한다. 떨어지다가 모자가 벗겨지기도 한다. 작년의 도토리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으면 햇도토리들은 더욱 반짝이고 동글거린다.

주워온 도토리는 가을볕에 말린다. 밤과 마찬가지로 도토리도 속껍질을 한번 더 벗기면 그 속에 과육이 들었다. 속껍질은 어떻게 벗기지?

잘 마른 도토리들을 신발을 신은 발로 자근자근 밟고 걷는다. 상수리나무 밑도 아닌 데서 도토리 산책을 한다. 잘 마른 껍질들이 깨지고 갈라지면서 떨어진다. 그러면 이제 과육과 껍질 조각이 섞인 이 무더기를 보따리에 싸서 집 근처의 좋은 공터나 놀이터 한구석으로 간다. 그런 다음 키질을 하는 것이다.

아직 온전한 껍질을 둘러쓰고 있는 놈들은 알맞은 연장으로 내리쳐 준다. 이렇게 한나절 쭈그려 앉아 있다 보면 가을볕에 달고 시원한 것이 먹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쯤 하면 도토리 농사를 한, 반정도 한 것일까. 이후의 공정은 또 다음 번 친정에 다녀와 기록하기로 한다.

 

도토리묵을 좋아라 하는 딸아이도 함께 도토리 껍질을 까다 왔다.

딸아이만치나 참을성이 없는 나는 잠깐 쪼그려앉아 돌멩이를 내리치다가 아이 손을 잡고 앞에 가게에 브라보콘을 사러 갔다.

엄마는 그 공정을 다 끝낼 때까지 한번도 일어나지 않으셨고, 다 끝나자 소변이 급하다며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 잠깐의 공터 구석의 시간 동안,

무엇이든 겉핥기에 짐작하기 좋아하는 나는,

나의 불안과 조갈은 농사일로써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감을 얻었다.

자연 속에서의 무념의 단순 노동.

그러면 우주 한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한 점으로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마 치맛자락도 어여쁘게 펼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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