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에 굴드가 죽고, 이 책은 1988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한 20년 굴드를 들었지만'이라고 말하는데,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한 연주자의 연주를 얼마나 많이, 오래, 깊이 들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휘둥그레진 눈을 감을 수가 없고, 음악이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전기라면 전기문이지만 생애의 사건적인 것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다만 '예술가의 경우 작품의 총목록이 곧 그 삶의 전기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얘기하는 전기이다.
굴드의 연주들, 연주회들을 중심으로 '굴드와 음악'을 깊고 섬세하게 해부한 글이다.
글렌 굴드의 데뷔 음반이자 (거의) 마지막 녹음 음반의 연주곡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와, 두 개의 '아리아'와 총 30개의 장으로 구성한 책은 그 자체로 아주 아름답고, 책을 읽으면 두 사람 모두를 모르는 독자라도 저자가 이 연주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다.
'음악-음악가' 대신 모든 '예술-예술가'를 대입하여 읽을 수 있다.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 반짝이는 깨달음들이 가득한 책이다.
다음과 같은 굴드의 마지막 순간을 기술한 문단을 읽으면 저자가 굴드를 얼마나 사랑하였지가 전해져, 가슴이 먹먹해진다.
"발작을 일으킨 날 굴드는 평상시보다 훨씬 일찍, 오후 2시30분이나 3시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몹시 심한 두통을 느꼈다. 그 자신 어떤 구체적인 조처도 취하지 못한 채, 그의 일을 두루 맡아 보는 레이 로버츠에게 전화를 했다. 레이는 롱펠로라는 이름의 그의 자동차---등과 목에 충격과 고통을 주지 않도록 비스듬히 특수 제작된 좌석을 가진---열쇠와 아파트 열쇠, 호텔의 스튜디오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또 전자 경보 시스템에 의해 굴드와 항상 연락을 취하고 부름에 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날 그는 굴드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레이는 굴드가 그렇게 일찍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부재중이었으며, 2시간 뒤에야 아내를 통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굴드의 요청으로 그의 자동차에 설치해 둔 전화가 아마도 연결되지 않았던 것 같다. 때론 기술도 탈이 나는 법이다.
마침내 그가 의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 굴드는 이미 정신이 흐려져 있었지만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앰뷸런스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앰뷸런스가 흰색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혼자 자신의 롱펠로를 타고 병원으로 가길 원했다.
그래도 될지 망설이느라 시간을 소비했다. 병원에 도착한 굴드는 두 번째 발작을 일으켰다. 누가 그의 눈을 감겨 주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사진들에서 볼 수 있는 이 움푹 팬 두 눈을. 그 날은 마치 북극의 가을이 오기 싫어하는 듯 아주 따뜻한, 그가 좋아하지 않았을 그런 날씨였다."
(171~172)
이어지는 장례식 장면.
"장례식에는 약 3천 명의 조객이 참석했다. 대부분 굴드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아주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온 이유를 그들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우리를 알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되는 그런 이를 향한 어떤 막연한 우정에 떠밀려 왔다고나 할까.
장례식 동안에 음악이 들려 왔다. 바흐의 곡이 연주되었으며, 콘트랄토 모린 포레스터가 특별히 '아리아'를 노래했다....
그후 잠시 동안 흐른 침묵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가벼운 당혹감에 빠뜨렸다. <골트베르크>의 첫 부분의 '아리아'가 마치 그가 연주하고 있는 듯 머뭇거리며 숭고하게 울려 나오자 사람들은 굳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투명하고 조심스러운 음향이 교회를 가득 채웠다. 그의 예전 연주(1955년 첫 녹음 연주, 맨 앞 '아리아'의 연주 시간이 1982년 녹음에 비해 반밖에 안 되는 템포로 녹음한)만 들었던 많은 사람들은 아주 느린--각각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과의 공명 속으로 들어가도록 발음되는 형식--이 템포에 낯설었지만, 굴드의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음들 사이로 그의 흥얼거림이, 빛나는 육신을 동반한 은밀한 그림자처럼 들려 왔다." (172~173)
저자는 글의 끝에 말한다. "굴드를 들으며, 굴드에 관해 쓰며 결국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았던 예술가들, 그러나 이들 덕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그나마 괜찮게 살 수 있게 된 그런 예술가들을 경험할 때 늘 그렇듯이."라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말은 적절한 것 같다. 그들은 성자나 영매처럼, 그들에게 들린 '예술'에 부림을 당한다. 그들은 이 상징계에 자기 몫의 삶이 없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들은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어떤지를 알지 못하고 외롭게 살고 죽는다.
그를 둘러싼 세속의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 찬양하고 사랑해도 소용없다. 그리고 그 칭송과 찬양과 사랑이라는 것이 나는 역겹다. 그들은 대개 맛좋은 부위를 신선할 때 집어먹으려는 탐욕스런 돼지들과 비슷하다.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삶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자신은 알지 못하는데 남들은 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예술가는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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