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은은 2010. 5. 27. 00:16


빈의 어마한 비트겐슈타인 가문에서 두 미치광이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조카, 이 소설에 등장하는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 교류의 역사와 국면을 주섬주섬 나열한 것이 이 소설인데, 사변투성이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고 잘 읽히는 것은 표현이야 어떻게 했건, 저자는 친구인 파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몇 군데 옮겨 적는다. 특히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 이야기는 몇 년 전 내가 절실히 느끼던 것이라 옮겨 적지 않을 수 없다.그때 나는 이 곳과 저 곳의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살 만했었다. 그때 '도착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생각했었다.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끔찍하게 되어 버린 그의 삶(44)

---건강한 사람이 병자 앞에서 부리는 위선은 위선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건강한 사람은 실은 병자와 더 이상 아무 상관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병자가--정말로 중병에 걸린 사람이--갑자기 다시 건강해지고 싶어하면 전혀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병자가 다시 건강해지는 일 혹은 최소한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일 혹은 최소한 병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일을 늘 어렵게 만들 뿐이다. 건강한 사람은 솔직히 병자와 아무 상관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병과 그로 인해 당연히 떠올리게 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혼자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그들은 사실 병자를 용납하지 못한다. 나 자신도 병자의 세계에서 건강한 자의 세계로 되돌아오는 일에 늘 방해를 받곤 했다. 병에 걸려 있는 동안 건강한 사람은 철저하게 병자에게 등을 돌려 버린다. 그들은 그를 내버려둠으로써 자기 보존의 본능만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이미 접어 둔 사람, 마침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던 바로 그 사람이 다시 와서 자기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물론 병자에게 실은 그에게 어떤 권리도 없다는 것을 즉시 눈치채게 한다. 건강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병자에게는 더 이상 아무 권리도 없다. 나는 항상 중병 환자들, 즉 나처럼 그리고 파울 비트겐슈타인처럼 평생 동안 앓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병자들은 병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이 베푸는 것만을 먹고 살아야 하는 금치산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병자는 그의 병 때문에 자리를 비워 주었는데 갑자기 다시 자기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이것을 늘 극도로 뻔뻔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66-67)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이 운명적인 상태는 지난 몇 년 간 더 악화되어 나아지지 않았으며, 나는 점점 더 짧은 간격으로 빈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나탈로 되돌아오고 나탈에서 다른 큰 도시, 즉 베니스와 로마로 갔다가 되돌아오고 프라하로 갔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금방 떠나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 온 곳과 가는 곳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인간 중 하나이다.(119) 


두 번째의, '병에 걸린 사람'의 입장에서 건강한 사람들을 느끼는 내용은, 나에게 좀 다른 방식의 똑같은 경험을 겹쳐 놓게 한다. 인생의 전반기에 나 역시 정상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일종의 '금치산자'였으며, 어느 날 내가 나의 욕망을 드러내자마자 나에게 한없이 글썽이는 표정으로 선의를 보이던 사람들이 건드려진 조개들처럼 자기들을 꽉꽉 다무는 것을 목격하고 겪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살든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 시절을 함께 보낸다고 믿는 동안 나는 늘 현장에 없는 사람이었으며, 그 입장 때문에 어느 순간 대단하게 우월한 지위를 누리거나 어느 순간 대단하게 열등한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여기 없는 사람'일 때 나에게 그토록 특별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내가 그들과 같이 '이 곳에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모두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되었다.
베른하르트의 어조에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 서려 있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내 입장에서 역시 그들을 비난하고 싶기도 하고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아마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크게 화를 낸다면 그사람이 가장 윤리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수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들  (0) 2010.06.20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0) 2010.05.29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0) 2010.05.22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0) 2010.05.22
영화 <시>  (0) 2010.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