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트 온 스캔들>
007의 주디 덴치 여사께서 인생을 잘못 산 채 뻔뻔하고 집요하게 늙어 버린 레즈비언 교감 선생님으로 나온다. 그 인물이 괜찮다. 인생을 잘못 살고도 자기를 굽히거나 금욕적으로 엄숙을 떨지 않는다는 점이(그런가 보다. 소설 <어젯밤>을 읽으면서도 죄의식 없이 자기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그 인물들이 예뻐 보였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예쁜 꽃을 꺾는 마녀 할멈처럼 야들야들 하늘하늘 싱싱한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자기 욕망을 채운다.
2. <녹색 광선>
홍상수와 관련해서 늘 언급되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 같다. 한 젊은 까다로운 여자가 여름 휴가 내내 우연히 엮이게 된 사람들 무리를 떠돌며 소외감을 느끼기만 하다가, 기차역에서 마침내 잘 어울리는 남자를 만난다는 줄거리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소외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남들과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 소외감, 자기만 세상에 잘못 온 것 같고 잘못된 사람인 것 같은 불안과 설움 같은 감정을 작정하고 다룬 영화가 진즉에 있었구나.
3. <렛 미 인>
김혜리 기자께서 몇 번이나 언급하기에 찾아보았다. 간결하고 적막한 풍경 속에서 치명적인 관계가 탄생한다. 흡혈귀 소녀 '엘리'와 함께 등장하고 중반쯤 병원에서 죽는 중년 남자 생각을 자꾸 할 수밖에 없다. '진짜 사랑(결혼 같은 것 말고)'이란 것의 속성 중에는 분명 이처럼 '내 존재를 받아들여 줘=나가서 살인을 하여 나를 지켜 줘'라고 요구하는 구석이 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그런 요구를 강력하게 내밀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4.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루마니아의 중장년 남자들이 과연 이 영화 속 인물들과같이 구수하고 유머러스하다면 루마니아에서의 삶이란 괜찮을지도 모른다. 빚을 진 사람들을, (뜻밖에) 빚쟁이가 된 사람이, 성탄의 흰 눈처럼 살며시 덮는 결말.(자기를 지키는 방법 중 한 가지. 대면한 사람이 뛰어나다면 그 앞에 고개 숙이고, 대면한 사람이 어리석다면 불쌍히 여기고, 그러나 모두 평등한 한 개 '목숨'의 주인임을 전제할 것)
5. <여름의 조각들>
영화 속 책상이 탐나다. 그리고 오르셰 미술관에 가고 싶어지다. 첫 장면의 빛나는 녹음과 아이들이 오래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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