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는 1989년에 죽었고, 이 작품은 그 4년 전인 1985년에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현암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1982년 씌어졌다. 그 사이에 씌어진 <몰락한 인간>은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호로비츠와 글렌 굴드를 모델로 삼았다는 작품.).
베른하르트 독설의 정수라고나 할까.
음악, 미술, 문학, 철학 분야의 '옛 거장들'은 모두 남아 나질 못하는 것은 물론(고야, 괴테, 노발리스, 쇼펜하우어, 야나체크, 쇤베르크, 베베른 등 몇 사람 정도 살아 남았을까..'그게 사실이에요!'), 교사, 국가, 예술을 즐기려는 대중들, 언론, 현대 예술가들...모두모두 박살난다.
230쪽 조금 넘는 한 문단짜리 이 소설이 나에게는 정말 리드미컬하게 술술 읽힘.
요설이라 친다 해도 머릿속에 이처럼 지독하고 방대한 분량의 사고를 집어넣고, 그것을 밀어내는 힘은 참.
--우리는 한평생 내내 위대한 사상가 그리고 소위 그 옛 거장들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에게 치명젹인 실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와 옛 거장의 작품을 수집하고 삶의 중대한 순간에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사실 치명적인 오류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 악용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정신의 금고를 이 위대한 사상가와 옛 거장들로 가득 채우고는 인생을 결정짓는 그 순간에 그들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적 금고를 열어 보게 되면 그것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에요. 우리는 비어 있는 정신의 금고를 보게 되고, 우리는 혼자이며 실제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우리는 모든 분야에 걸쳐 한평생 동안 모아 들이는데 정신의 재산에 있어서는 결국 혼자 남게 됩니다 하고 레거는 말했다. 내가 그토록 많은 정신의 재산을 끌어모았는데도 결국에는 완전히 비어 있습니다...그리고 당신은 살아가면서 수십 년 동안 함께한 그 위대한 사상가나 옛 거장들이 아니라, 당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바로 그 사람만이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226-227)
--오늘날의 세대는 이상하게도 음악에 대해서 십오 년 내지 이십 년 전의 최고의 음악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술이 발달하여 음악을 듣는 것이 아주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음악을 듣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디에 가든 항상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백화점이나 진료실 그리고 어느 거리에서도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음악을 들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오늘날엔 전혀 음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음악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시대는 완전히 음악이 사방을 둘러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혼란이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우리 시대는 총체적인 음악으로 가득합니다. 북극에서 남극에 이르기까지 도시든 농촌이든 바다든 사막이든 상관없이 당신은 음악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음악으로 포식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음악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이 엄청난 일은 당연히 당신이 요즈음에 듣는 음악회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 현대인들은 그 밖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음악 소비주의에 시달리고 있지요 하고 레거는 말했다. 현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산업이 이 음악 소비주의를 너무도 부추겨 사람들이 모두 몰락해 버렸습니다...음악 산업은 처음에 그저 사람들에게 양심의 가책이 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히 세상 전체에 양심의 가책이 될 것입니다.(218-219)
--우리는 곧바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가 오월 말이었는데, 때 아닌 눈보라가 다 쳤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나는,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장바구니를 들고는 징어가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방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웠지요. 나는 다시는 저들에게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에게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고 레거는 말했다. 징어가를 내려다보는 동안에 나는 아래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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