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영화들

은은 2011. 3. 23. 14:35

한때는, 나도 남도 잘 포착하지 못하나 분명 존재하는, 잘 말해지지 않는 사람의 예민한 감정에 관한 영화들을 참 좋아했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얼른 생각난다. 요즘은 마치 신화처럼,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들이 좋다. 바로 <더 브레이브>와 같은 영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선 열네살 소녀 매티, 고주망태에 제멋대로 총을 쏘고 다 늙도록 집 한 칸 없어 구멍가게 뒷방에서 겨우 기숙하는 술꾼 보안관, 끈기와 집념으로 악인을 쫓아 텍사스에서 달려온 젊은 보안관 라뷔프. 아버지와 두 남매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삼촌과 딸 같기도 한 이들 조합이 빚어내는 정서의 자기장이, 겨울의 황량한 자연뿐인 간소한 배경 덕분에 오롯하게 펼쳐진다.
뱀에게 물린 매티를 안고 늙은 보안관이 별의 벌판을 달리는 장면은 별과 인간애만 스크린 가득 넘쳐 감동의 눈물을 선물한다. 명장면.
용감한 매티는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고, 아버지의 존엄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그 대가로 한쪽 팔뿐인 아가씨가 되고 노처녀가 되어야 했지만, 주저함도 회한도 자책도 없었을 것이다. 계산이 없는 신화의 세계. 인물들의 명징한 윤곽과 존재감.

<three monkeys>는 <우작>을 만든 터키 감독의 영화라기에.
이 역시 네 명의 주요 인물만 등장하는 느리고 단순한 영화. 한 여인의 사랑을 둘러싼 세 남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또는 하나의 진정한 감정이 어떻게 정치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영화.

말해질 수 없으나 치명적인 무엇에 관한 영화로 <파수꾼>을 들 수 있겠다. 대개 자신의 '정체'에 관한 것들은 말해질 수 없거나, 말해지지 않거나, 말해져서는 안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말'은 그 '정체'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일까. '정체'는 말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말해 버리는 자는 물질의 세계/질서 안에서 자기의 정체를 형성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아주 쉽게 말하면 이성 문제가 불거지자 우정에 금이 가는 상황을 다룬 영화이다.
기태와 동윤과 희준을 번갈아 떠올려 볼 때, 나는 희준이란 인물의 영악함이 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준은 느껴 알았으나 모르는 척하는, 그리고 가책으로부터도 홀홀 빠져나가는 인물이다. 희준은 자신의 욕망을 반성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하면 틀린 말이려나. 희준은 자신의 명백한 가해에 대해 느껴 알지만 반성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와 같은 피해의식/가해의식은 전적으로 주관적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밖에서 어떤 판단으로 비난할 수 없는 것이긴 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윤리가 엄연히 존재하므로 비난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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