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허영의 달인
그녀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다. '왜 나에게는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 걸까?' 그녀는 돈과 도덕 그리고 사회적 인정 그 어느 것에도 몰입하지 않는다. 이 세속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녀 역시 아주 자주 자신이 이 세속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은 그녀의 허무를 더 빨리 읽는다. 가끔씩 그녀의 허무를 바라보는 사내 몇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순수한 그녀가 이 세속에서 너무 함부로 취급받는다는 점에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막상 그녀는 그런 평가에는 무심해 보인다. 차라리 봄날 볕 좋은 곳에 소풍 온 순수의 아다다처럼 머리에 꽃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는 굳이 거짓된 방법들을 동원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허무는 실상 그녀가 도대체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허무와 방대한 세상에 대한 욕망이다. 말하자면 허무에 대한 허영!
사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허영의 힘으로 산다. 그녀는 이 허영의 방대한 공해 속을 믿는다. 그것의 안과 밖은 오직 관념일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을 과신한 거 같다. 그녀는 결혼했기 때문이다.---(중략)---아무튼 그녀는 결혼 후 사내애를 하나 낳았다. 애는 무럭무럭 잘 자랐고, 삶은 별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설렘을 묻어버린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는 듯했다. 세상에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누군가를 위해 노력 봉사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것도 참 좋은 에너지 소비 방안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허무의 허영을 가진 이들이 다들 그렇겠지만, 그녀는 이토록 자비롭고 슬프고 거짓스럽다.
허영은 어쩌면 그녀의 그 어떤 증상 같은 것이었다. 모든 증상이 그렇듯, 자신이 누리고 산 허영으로 인해 그녀가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올 것임은 자명했다. 도대체 내가 진실로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고, 내가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용감하게 나의 밖으로 뛰쳐나가 이 세상 속에서 나를 실현하지 못했던 걸까. 가끔이 이런 질문이 무섭게 치고 나왔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허무했으므로 그 정도의 밑도 끝도 없는 절실함은 지그시 깔고 앉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허영이 거짓이면서 동시에 진실인 것처럼 그녀의 경우에도 그랬다. 하지만 자기 허영의 테두리가 너무 단단해서 세상과 조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허영은 가히 퇴폐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허영이 슬슬 금이 가다가 끝장날 때까지도 그 속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쓸쓸한 일이다. 그녀는 빈집에 홀로 남아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라도 수첩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허영 속에서 길을 잃은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약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때 그녀가 설렘을 느꼈던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이미 자신은 세월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되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제 이 생활이 그녀의 세상이 된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허영을 불러일으켜 이 동굴 속에서 벗어나야 할 의욕을 얻어야 할 그런 시점이었지만 그녀는 차라리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삶은 아무래도 계속되는 거지."
그녀의 허영은 그녀의 허무를 넘어서는 허영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베란다에 나가 이불들을 털었다. 이제는 허무의 허영이 아니라 이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는 허영이 그녀에게 조금의 안정감을 내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녀는 허영에 있어 꽤 고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허영의 달인을 찾는 데 약간의 길 안내만 해줬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그녀를 한참 더 넘어서는 허영의 달인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시기를 넘기고 허영의 분야에서 꽤 인상적인 한 획을 이생에서 그을 수 있다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며 이런 한 구절쯤 유언으로 남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세상의 야생성을 너무 멀리 미뤄두어 제 생각의 체계 속에 갇힌 자비롭고 쓸쓸하고 거짓된 그녀의 입 밖으로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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