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106

에릭 로메르, '겨울이야기'

서울아트시네마, 2월22일 !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 남자, 우정과 사랑 사이의 남자, 바로 그 남자, 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아니한가. 그 감정의 결을 포착하여 그려 보여주는 재주도 감탄할 만하지만, 영화 속에서 배운 것 없는 미혼모 미용사로 그려지는 여인이 자신의 감정의 결과 뉘앙스를 그토록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놀랍고, 그것이 상대 남자들과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이해된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그리고 주제는, 사랑의 감정에 대하여 자신과 적당히 타협하지 말 것, 자기 자신으로서, 행복하고 싶다면. !! 연애하는 남녀가 침대에서 벗고 누워 있는 장면. 그림은 같은데 프랑스 영화에서와 한국 영화(예의, 홍상수 영화들)에서 그것을 볼 때 느낌이 어찌 이리 다른지. 이 재미난 차이가 홍상수 감독..

수집 2011.02.23

다행한 일들, 김소연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어, 카디건을 꺼내 입으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조개껍데기가 만져져, 아침이야 비가 내려,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 하나는 지난 계절의 모든 바다들을 불러들이고, 모두가 다른 파도, 모두가 다른 포말, 모두가 다른 햇살이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자를 선물해, 지난 계절의 기억나지 않는 바다야 지금은 조금 더 먼 곳을 생각하자 런던의 우산 퀘벡의 눈사람 아이슬란드의 털모자 너무 쓸쓸하다면, 봄베이의 담요 몬테비데오 어부의 가슴장화 비가 내려, 개구리들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 언젠가 진짜 비가 내리는 날은 진짜가 되는 날, 진짜 비와 진짜 우산이 만나는 날, 하늘의 위독함이 우리의 위독함으로 바통을 넘기는 날, 비가 내려, ..

수집 2011.02.23

김태용 감독 영화 '만추'

보고 난 다음 시간이 갈수록, 그 여자 애나 첸(탕웨이)의 가슴 속 물결이 넘실댄다. 보는 동안, 극장을 나서면서는 '에이, 좀 아쉽다' 했지만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고, 와플집을 찾아 이대 후문과 삼청동을 헤매고, 집에 돌아와 봄동을 된장에 찍어 늦은 밥을 먹고, 냉장고 안을 정리하고, 자잘한 설거지를 하고, 물을 끓이고, 급체한 남편의 손을 따주고 등을 두드려 주고, 내 약들을 챙겨 먹고, 잠자리를 보고...그 사이사이, 애나 첸을 연기한 탕웨이의 얼굴이, 늦은 가을색 코트 자락이 보인다. 이즘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그 마음들이, 절실하게 오는 바가 있어서 그렇기도 할 게다. 김태용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마음의 어떤 구석은 '화양연화'를 찍은 왕가위와 닮은 데가 있지 않을까 혼자 그렇게 생각해 본다..

수집 2011.02.21

영화잡지 기자들의 글에서 두어 문장

"...더구나 그녀(영화 의 주인공 소녀 리 돌리)의 부모가 무능하거나 무책임하며 숨통을 틔워 줄 만한 어른이나 친구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는 흡사 신화의 세계에서 뚝 떨어진 인물 같다...." "...활동 시기가 일부 중첩되는 화가 피카소는 보나르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고 전해진다. '회화는 감수성 문제가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권력을 나꿔채야지 자연으로부터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피카소에게 회화가 혁명이었다면 보나르에게는 도피였다. 실제로 보나르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직이란 말이 내게 맞는지 확신이 없다. 나를 이끈 건 예술 자체라기보다 예술가의 인생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단조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썼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

수집 2011.02.16

황정은 소설집 <일곱시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해설(서영채)에서

 황정은의 환상이 지니고 있는 독특성은 명랑성과 비애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견길 수 없는 고통이나 깊은 슬픔과는 달리, 비애는 우리가 일상인으로서 살아감에 있어 어떤 식으로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체념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상태로부터, 즉 부조리한 세계 상태에 대해 체념할 수밖에 없고 그 불가피성 때문에 오히려 그런 상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버리려고 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명랑성이 만들어진다. 비애와 명랑성이 이런 방식으로 결합되는 지점에서 황정은 특유의 환상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것은 황정은의 서사적 감수성이 지니고 있는 저 실없는 명랑성 때문인데, 이것은 카프카나 플라톤의 경우처럼 일종의 마조히즘적인 유머로 읽힌다. 그것..

수집 2011.01.25

제인 캠피온 영화 <브라이트 스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25년 생애 중 마지막 3년 간의 사랑을 소재로 삼은, 제인 캠피온의 2009년작 영화. '셸리, 키츠...'처럼 흘려 들은 이름이고, 번역된 낭만주의 시에서는 좀체 마음에 오는 감상이 없었으나, 영화에서 묘사된 키츠와, 그의 연인과, 그들의 사랑은 빛나는 별 같다. 영혼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 아름다움이 있다면 거기에는 영혼이 관련된 것이란 사실, 눈물 너머 이런 반짝임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조건과 자연의 현존을 감사하게 하는, 영화. 아름답다.

수집 2010.07.23

이창재 지음, <프로이트와의 대화>

주체적으로 제대로 만나고 알지도 않은 채 무성한 소문에 귀와 입이 불러 마치 다 아는 양 자신조차 착각하게 되는 사상이나 작품들이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른 목록으로 있는 것인데,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그렇게 취급되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 프로이트일 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 그런 우를 범하지 말자 싶어 오롯이 한번 대면해 보려고 마음먹으면, 그 깊고 방대함에 곧 갈피를 못 잡게 되고, 전공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교양' 차원의 독서를 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나의 경우, 전공자가 아니면서 또 평범한 '교양인'도 못 되도록 불성실한 독서와 '감'으로 넘겨짚는 버릇으로 중요한 프로이트를 아주 망쳐 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호기심에 이끌려 라깡, 지젝 등으로 덤벙대고 만 지경이라고..

수집 2010.07.23

영화들

1. 007의 주디 덴치 여사께서 인생을 잘못 산 채 뻔뻔하고 집요하게 늙어 버린 레즈비언 교감 선생님으로 나온다. 그 인물이 괜찮다. 인생을 잘못 살고도 자기를 굽히거나 금욕적으로 엄숙을 떨지 않는다는 점이(그런가 보다. 소설 을 읽으면서도 죄의식 없이 자기 욕망을 향해 돌진하는 그 인물들이 예뻐 보였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예쁜 꽃을 꺾는 마녀 할멈처럼 야들야들 하늘하늘 싱싱한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자기 욕망을 채운다. 2. 홍상수와 관련해서 늘 언급되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 같다. 한 젊은 까다로운 여자가 여름 휴가 내내 우연히 엮이게 된 사람들 무리를 떠돌며 소외감을 느끼기만 하다가, 기차역에서 마침내 잘 어울리는 남자를 만난다는 줄거리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소외감'이라..

수집 2010.06.20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베른하르트는 1989년에 죽었고, 이 작품은 그 4년 전인 1985년에 나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현암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는 1982년 씌어졌다. 그 사이에 씌어진 은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호로비츠와 글렌 굴드를 모델로 삼았다는 작품.). 베른하르트 독설의 정수라고나 할까. 음악, 미술, 문학, 철학 분야의 '옛 거장들'은 모두 남아 나질 못하는 것은 물론(고야, 괴테, 노발리스, 쇼펜하우어, 야나체크, 쇤베르크, 베베른 등 몇 사람 정도 살아 남았을까..'그게 사실이에요!'), 교사, 국가, 예술을 즐기려는 대중들, 언론, 현대 예술가들...모두모두 박살난다. 230쪽 조금 넘는 한 문단짜리 이 소설이 나에게는 정말 리드미컬하게 술술 읽힘. 요설이라 친다 해도 머릿속에 이처럼 지독하고 ..

수집 2010.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