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106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빈의 어마한 비트겐슈타인 가문에서 두 미치광이로 취급되는 사람들이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조카, 이 소설에 등장하는 파울 비트겐슈타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 교류의 역사와 국면을 주섬주섬 나열한 것이 이 소설인데, 사변투성이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고 잘 읽히는 것은 표현이야 어떻게 했건, 저자는 친구인 파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몇 군데 옮겨 적는다. 특히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 이야기는 몇 년 전 내가 절실히 느끼던 것이라 옮겨 적지 않을 수 없다.그때 나는 이 곳과 저 곳의 사이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살 만했었다. 그때 '도착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생각했었다.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끔찍하게 되어 버린 그의 삶(44) ---건강한 사람이 병자 ..

수집 2010.05.27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1982년에 굴드가 죽고, 이 책은 1988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한 20년 굴드를 들었지만'이라고 말하는데,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한 연주자의 연주를 얼마나 많이, 오래, 깊이 들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휘둥그레진 눈을 감을 수가 없고, 음악이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전기라면 전기문이지만 생애의 사건적인 것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다만 '예술가의 경우 작품의 총목록이 곧 그 삶의 전기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얘기하는 전기이다. 굴드의 연주들, 연주회들을 중심으로 '굴드와 음악'을 깊고 섬세하게 해부한 글이다. 글렌 굴드의 데뷔 음반이자 (거의) 마지막 녹음 음반의 연주곡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와, ..

수집 2010.05.22

한강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

이런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듯이 한강은 느리고 여린 문체를 쓰고 있다. 그리고 여리고 느린 것들도 싸우고 살아 내야 한다는 듯이 소설의 이야기를 끌고 간다. 평범한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생전에 관계한 몇몇 사람들 속에서 치러질 뿐이다. 보통 자식을 뒤에 남기지만, 예술가들은 작품을 남긴다. (자식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읽고 느낀 기록이 아니고, 작품은 한 사람이 세상을 읽고 느끼고 거기에 자기를 적어 넣은 기록이다.)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의 삶을 타인은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죽은 사람 자신은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렇게 객관적인 거리에서밖에 나는 생각을 못 하겠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라면 얘기의 색채가 달라질 것일 터이지만,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것이..

수집 2010.05.22

영화 <시>

'맞다, 시는 그런 거다' 그런 영화다. 조용히 바람이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흔들고, 그 아래서 미자는 저녁마다 배드민턴을 칠 뿐이지만 그 아래 너무도 가차 없고 엄정한 칼이 있어 자신을 물어야 하는 것, 목숨 걸고 쓰는 것이 시라는 걸 말하는 영화. 스틸 사진 속 윤정희의 얼굴에 백건우의 얼굴이 보이는 건 나만일까(부부는 닮는다!). 미자가 그런 건지 윤정희가 그런 건지, 주인공은 연약한 듯하면서 단호하고 망설이는 듯하면서 정직하다. 미자가 들고 다니는 수첩이 있다.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그때 적으라고 시인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꽃을 보고 떨어진 살구를 보고 생각 나는 것들을 적는 수첩이다. 여중생이 떨어져 죽은 강가에 가 앉아 뭔가를 적어 보려고 수첩을 꺼냈을 땐 아무것도 쓸 수 없고 빗방울이..

수집 2010.05.22

제임스 설터 단편집 <어젯밤>

한 번 읽은 소설을 되돌아 다시 읽는 일는 나로서는 거의 없었는데 이 소설집의 단편들은 그랬다. 끝까지 다 읽고, 되돌아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다시 읽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인 줄 착각했던 던컨 한나의 그림 속 여인의 눈빛과 표정, 왼쪽 상단에 어두운 붉은색 명조체로 제목을 박은 표지의 분위기만으로도 손이 저절로 가게 만드는 책. 전부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가장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어젯밤'은 맨 끝에 놓인 작품이다. 나는 세 번째 작품인 '나의 주인, 당신'이 가장 좋았다. 이 소설은 무척 관능적이고 섹시하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전부 무척 사랑스럽다. 그들은 모두 '욕망으로 순수해진' 얼굴로 지저분한 망설임이나 가책 없이 상대를 배신하고 또 다른 상대에게 매달린다. 그들..

수집 2010.05.14

<하하하>

홍상수 감독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 사람의 영화들을 차례로 생각해 보면, 감독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성장 혹은 변화의 기록이기도 하고, 이방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뚝 떨어진 사람이 조금씩 거기에 적응해 가면서 나오는 태도와 인식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방인이지만 그 사회와 아주 무관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거기에 '핏줄'이 얽혀 있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가 한국 사회를 대하는 그토록 특이한 감각과 뉘앙스가 만들어지는 까닭이란 생각이 든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조건과 마주쳐 선택을 해야만 할 때, '풍자냐 자살이냐' 중에서 홍상수의 초기 영화들은 확실히 '자살' 쪽에 가까웠고 점점 '풍자'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는, 마지막 문경의 주저앉음이 보여 주듯(캐..

수집 2010.05.07

<하하하> 시사회와 관객과의 대화

1. 는 홍상수 감독의 열 번째 장편영화라고 한다. 출연 배우는 김상경, 문소리, 유준상, 김민선, 예지원, 윤여정, 김강우 등. 배경은 경남 통영. 서울에서 영화 감독을 하는 문경(김상경)과 그의 친한 선배 중식(유준상)이, 청계산 밑에서 만나 각자의 통영 여행의 추억을, 좋은 것만 이야기한다는 얘기. 영화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정말 진짜로. 여자 입장에서, 그 동안의 홍상수 영화의 여자 주인공들과 달리,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 왕성옥(문소리)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하, 하, 하! 2. 독자 초청 이벤트에 당첨되어 보게 된 것이었는데, 영화 상영 뒤에 관객과의 대화가 마련될 줄 몰랐다. 알았으면 카메라와 사인지도 준비해 갔을 건데! 정한석 기자께서 사회를 보고 홍상수 감독, 문소리, 유준상 씨 들이 참..

수집 2010.04.28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

...내가 최초로 나의 주치의에게 나의 가슴 위에 심장 자리를 붉은 잉크로 표기하도록 한 것이 바로 그 시기였다. : 만약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다면 나는 결코 산 채로 루시우스 키에투스의 수중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인접한 지방들과 섬들을 평정하는 어려운 과업이 나의 직위의 다른 임무들에 첨가되었지만, 그러나 낮 동안의 기진케 하는 일은 불면의 긴 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국의 모든 문제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나 자신의 문제가 더욱 무거웠다. 나는 권력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계획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나의 대책들을 시도하기 위해, 평화를 복원하기 위해 권력을 원했고, 특히 죽기 전에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권력을 원했다. 나는 마흔 살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만..

수집 2010.03.3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지젝을 강독할 때 자주 인용되던 소설가였군, 어디서 들은 이름이더라, 맥락을 한참 짚어 보니. 민음사에서 나온 소설집 두 권 , 를 빌려 읽다. 하나의 상황을 설정한 다음 그 안의 인물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이 주특기인 소설들이다. 느끼는 사람들은 집안의 가구나 입 안의 음식처럼 확실하게 느끼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망상이나 광기로나 느껴질 그런 것의 존재, '기운'이라고나 해야 할까, 무의식? 실재계의 증거? 바로 '그것'을 잘 드러내 보인다.

수집 2010.03.10

요즘 본 영화들

1. 500일의 썸머 톰 역을 연기한 남자 배우의 인상 착의(?)가, 연기에 더하여, 캐릭터와 극의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영화입니다. '나 완전 AA형이야'라고 얼굴에 쓰여 있거든요. 썸머 역을 연기한 여자 배우는 신비로운 파란 눈동자와 하얀 피부를 가진, 사상의학적으로 볼 때 하체 비만 체형의 소녀인데, 콩깍지 씌운 톰의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관객들도 실감할 수 있도록! 이란 기준으로 캐스팅된 배우 같습니다. 아주 미인도 아니면서, 영화를 보다 보면 톰에게 감염된 듯 어느 새 그녀가 사랑스러워집니다. 두 사람이 만날 무렵 톰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남자였고 썸머는 사랑은 언제든지 고통 없이 자를 수 있는 머리카락 같은 것이라고 믿는 여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에 그러니까 영화가 끝날 무렵 썸..

수집 2010.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