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106

<밀양>의 신애

에서 신애(전도연)가 겪는 수난은 그녀의 첫번째 멍에도 마지막 멍에도 아니다. 영화 안에서 신애는 남겨진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을 잃는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기적처럼 신앙에 의지해 일어서지만 잔인하게도 믿음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닥친다. 하지만 관객은 스쳐가는 암시를 통해 신애가 과거에 입은 내상들도 짐작할 수 있다. 착란상태에 빠진 신애는 중얼중얼 피아니스트의 꿈을 억압했던 아버지를 원망하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옮긴 채 죽어버린 남편을 욕한다. 이 우리의 눈을 오래 붙드는 것은, 유괴라는 뜨거운 범죄를 스토리의 뇌관으로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아니라 인물이 영화의 심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는 '자식 잃은 어머니'라는 처지 하나로 설명되는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성격에 기인한 비극을..

수집 2011.07.12

이윤 리, '천년의 기도'

"난 네 아버지다. 알 권리가 있어." 시 씨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한다. "우리 문제는 내가 남편한테 충분히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조용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내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죠." "너는 그에게 애인을 숨기고 있었잖니." 시 씨의 딸은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가 내게 이야기하라고 할수록 나는 혼자 조용히 있었으면 했어요. 아빠가 지적한 것처럼 나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넌 방금 전화에 대고는 그렇게 버릇없이 이야기하지 않았니! 이야기하고, 웃고, 꼭 무슨 창녀처럼!" 그의 격렬한 말에 어리둥절해진 시 씨의 딸은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건 달라요, 아빠. 우리는 영어로 이야기하고, 그러면 ..

수집 2011.06.19

이윤 리 '시장의 사랑'에서

"...그녀는 투와 자기 자신의 사랑을 믿었고, 그들이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희생을 믿었다. 그러나 삶은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에 민과 투는 사랑에 빠졌고, 샨샨의 마음 속에서 짝이 맞지 않는 섹스를 했다. 때때로 그녀는 민을 자신으로 바꿔 놓고 자위를 했다. 투와 그녀가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샨샨이 어머니의 난로 옆에 앉아 아장거리던 아기이고 투는 옆 과일 가게의 작은 남자아이이던 때부터 그들은 놀이 친구였다. 가슴이 터지도록 아름다운 상상 속의 섹스를 한 후 그녀는 울었다. 더 이상 자기의 상상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샨샨은 해바라기씨를 먹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매일 밤 그녀는 몇 시간씩 해바라기씨를 까며 앉아 있다. 일어나서 침대 밖으로 나오기 전에 제일 처음 해바라기씨 봉지로 손을 뻗..

수집 2011.06.14

윤영수 소설 반납하기 전

"죽는 건 그래. 자살은 없어. 확실하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는 없어. 자기가 살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수백 명 수천 명 죽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건 못해. 그렇게 잔인한 사람은 없거든. 그래도 죽는 사람은 있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고, 약을 먹고, 달리는 전동차로 떨어지고. 그건 자기를 죽이는 게 아냐. 자기 속의 타인을 죽이는 거지. 자기를 그렇게 하도록 밀어붙인 세상,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은 독하고 매정한 주위 사람들을 죽이는 거야. 자기 속에 자리잡은 채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그 사람들에 대한 미련, 원망들을 처단하느라 하는 수 없이 자기 몸을 희생하는 거야." 단편 '달빛 고양이'

수집 2011.06.03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에서

 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 와보니 아니나다를까, 여관 방 처마 끝에 매단 장식등에는 옥수수 빛깔의 커다란 나방이 예닐곱 마리나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옆방 옷걸이에도 작지만 몸집이 통통한 나방이 앉아 있었다. 창문에는 아직 여름용 방충망이 쳐져 있었다. 그 망에 나방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매달려 있었다. 노송나무 껍질 빛깔의 작은 깃털 같은 촉각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날개는 훤히 내비치는 엷은 녹색이었다. 여자 손가락 길이만한 날개였다. 맞은편에 펼쳐진 국경의 산들이 석양을 받아 이미 가을빛을 띠고 있어, 이 한 점 연녹색은 오히려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앞뒤 날개가 서로 겹쳐진 부분만 짙은 녹색이다. 가을바람..

수집 2011.04.11

영화들

 한때는, 나도 남도 잘 포착하지 못하나 분명 존재하는, 잘 말해지지 않는 사람의 예민한 감정에 관한 영화들을 참 좋아했다. 미카엘 하네케의 가 얼른 생각난다. 요즘은 마치 신화처럼,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들이 좋다. 바로 와 같은 영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선 열네살 소녀 매티, 고주망태에 제멋대로 총을 쏘고 다 늙도록 집 한 칸 없어 구멍가게 뒷방에서 겨우 기숙하는 술꾼 보안관, 끈기와 집념으로 악인을 쫓아 텍사스에서 달려온 젊은 보안관 라뷔프. 아버지와 두 남매 같기도 하고, 아버지와 삼촌과 딸 같기도 한 이들 조합이 빚어내는 정서의 자기장이, 겨울의 황량한 자연뿐인 간소한 배경 덕분에 오롯하게 펼쳐진다. 뱀에게 물린 매티를 안고 늙은 보안관이 별의 벌..

수집 2011.03.23

남자들 시 두 편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문태준 혼(魂)이 오늘은 유빙(流氷)처럼 떠가네 살차게 뒤척이는 기다란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일생(一생)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 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은 허물이 되었다 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 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 왔다 햇곡식 같은 새의 아침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 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 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 누가 있을까, 강을 따라갔다 돌아서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지 않..

수집 2011.03.09

황인숙, <해방촌 고양이>

작년에 나온 황인숙 시인의 산문집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음. 대체로 그녀의 관심사는 고양이, 돈, 체중 쯤이라고 할까. 벼르고 벼르고 별러서, 칙칙하지 않은 것들로 꾸미느라고 했을 것이 분명한데 가난과 몽상이 차마 남루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 때문일까, 나 때문일까. 맘에 들지 않는 꼬라지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때도 전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센 적의가 느껴졌다. 그녀를 알지 못하니 뭐라 말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이렇게 비교될 바는 전혀 아니지만, 그에 비하면 김소연 시인은 얼마나 약았는지.) 어느 한 편의 글에서 그녀가 시집을 여섯 권이나 낸 것을 자조하는 듯한 내용을 읽으며 이 나라가 급격히 정나미떨어지고 있고, 나 또한 급격히 정나미떨어지는 인간이 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

수집 2011.03.06

클린트이스트우드, <hereafter>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좋은 이유 1. 자신의 어리석음, 난데없는 세상의 악의, 인간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세상의 구조...무엇으로 인한 것이든 고난과 역경, 좌절, 실의 등등을 마주치게 된 인간들이 소란을 떨지 않는다. 2. 인물들이 마지막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선 너머는 묘사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그의 인물들은 결단을 내린다. 3. 그런 이유로 그의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나는 경우에도 '비극'이라 할 수 없다. 인물의 파멸이 없다. 그의 영화의 교훈 1.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타락한 인간'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용기이다. 용기란 죽음을 겁내어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어떤 이유로든 최악인 최악의 삶을 ..

수집 2011.03.06